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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0년 전 통영 앞바다에 새까만 바다귀신이 나타나..

진의장 전 통영시장 | 기사입력 2013/08/26 [07:50]

400년 전 통영 앞바다에 새까만 바다귀신이 나타나..

진의장 전 통영시장 | 입력 : 2013/08/26 [07:50]

 


▲ 진의장 전 통영시장    ©TYN
흑해귀(黑海龜), 이 말을 풀이하면 새까만 바다귀신이란 뜻이다.

지금으로부터 409년 전인 1604. 6. 14. 통영 앞 바다에 새까만 바다귀신이 나타났다! 

 
1987년 6월 어느날, 그러니까 필자가 하동 세무서장으로 재직시의 일이 였다.

 
우리나라 국제교섭의 석학이자 역사학자인 명지대학 박태근 교수, 하동 새미골 도요지의 도예가 최정간, 한국일보 박정수 차장, 그리고 필자 등은 통영의 잃어버린 역사를 찾는 답사단을 구성하여 통영의 당포 앞 바다를 찾는 일이 있었다.

 
박태근 교수는 규장각에서 조선시대 준사의 기록에 관한 도서인 비변사 등록을 연구하던 중, 그 등록 작성의 초안인 ‘등록유초’라는 문서를 찾았다.

 
여기에는 1604년 6월 14일 당시 삼도수군 통제사 이경준 장군과 그 외 참모장인 신여량 장군은 통영의 당포 앞 바다에서, 일본이 국제무역선인 주인선(朱印船)을 나포하게 된 사건이 기록되어 있었다.

 
비변사의 등록 중 전란으로 불타 없어진 부분을 찾아 낸 것이다.

 
이 발견으로 인해 통영시는 소중한 역사의 한 페이지를 얻게 되었다.

 
여기서 우리는 몇가지 역사적인 사실을 공부할 수 있다.


그 둘째는 비변사 등록이란 무엇이며, 등록유초란 무엇인지, 그 첫째는 일본의 주인선이란 무엇인지, 그 셋째는 조선땅에 제일 처음 들어온 서양사람이 누구인가, 또한 흑인으로 조선땅에 제일 먼저 들어 온 사람은 누구인가?

 
그 넷째는 6대 통제사 이경준 장군과 그 참모장이었던 신여량 장군은 어떤 사람이며 무슨 일을 하였던 것인가 등이다.

 
하나씩 공부해 보기로 하자.

 
1604년 6월 14일 남해 미조의 병영에서 봉화가 피어 오르고, 이르 받아 통영의 연대도에서 봉화가 피어 올랐다.

 
삼도수군통제서 이경준 장군은 참모장 신여량 장군과 함께 거북선과 판옥선을 이끌고 당포 앞 바다에서 출격하여, 거대한 왜선 한 척 과 교전을 한다.

 
종일 전투를 별였는데 마침 썰물 때가 되어 달아나는 왜선을 신여량 장군이 갈쿠리를 던져 나포하게 되었고, 그 배에 타고 있던 50여명을 포로로 잡았다. 그 포로 중에서 왜인 외에 서양인 한 명과 흑인 한 명이 있었으니, 이들을 심문하던 이경준 장군은 얼마나 놀랐겠는가?

 
먼저 이 배가 어떤 배인지를 보자.

 
이배는 일본의 쇼오궁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무역선으로 배의 이름은 '주인선' 이었다. 등록유초의 기록에 의하면 이 배에는 캄보디아 왕에게 가는 도꾸가와 이에야스의 특사가 가 타고 있었다.

 
특사 일행은 1604년 1월 1일 일본의 나카사키항을 떠나 게 되었는데, 이 날은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아들인 토요토미 히데요리가 도쿠가와 이에야스에게 항복하는 날이 였다. 그 행사 때문에 특사는 주군에게 인사를 드리지 못하고 떠나 게 되었다고 한다.

 
따라서 통제사 이경준 장군은 일본의 정세의 변화를 정확히 알고 보고를 하게 된 것이다.

 
주인선은 캄보디아에서 돌아오는 길에 마카오에 들려 포르투칼 사람 주엉 멘데스와 그의 從者인 흑인 한면을 싣고 오다가 태풍을 만나 표류하게 되고, 통제사 이경준 장군에게 나포된 것이었다.

 
흑인을 처음 본 이경준 장군은 아마 기절초풍 했을 것이다.

 
흑해귀(黑海龜)!! 얼마나 멋진 표현인가? 문무를 고루 갖추었다는 이경준 장군의 詩的 경지를 가늠할 수 있다.

 
일본에는 주인선의 설계도가 남아 있으며, ‘돌아오지 않는 배’ 란 이름이 붙여 있다. 한국일보 일면에 대서 특필 되었으며, 이를 받아 이사히,요미우리 신문에서도 400년 동안 비밀을 풀었다고 대서 특필 되었다.

 
비변사의 등록이 무엇이며 등록유초는 무엇인가?

조선시대 국방을 담당하는 부서는 병조(兵曹)였는데, 막상 전쟁이 터지면 순별력 있게 대응할 수 있는 구조를 갖지 못하였다. 이에 1517년(중종 12년)6월, 북방과 남방지역 두군데에 외적의 침입시 바로 대응 할 수 있는 기구를 설치하여 이를 “비변사(備邊司)”라 하였다.

 
비변사 등록이라 함은 이 비변사에 일어나는 일을 기록한 문서로서 승정원일기(承政院 日記), 일성록(日省綠)과 더불어 왕조실록을 기록한 3대 문서중에 해당한다.

 
병자호란으로 일부는 불에 타 없어지고, 1617년 이후의 기록 273권 밖에 남아 있지 않다. 즉 1604년의 기록이 없이 때문에 위와 같은 기록은 찾을 수가 없는 것이 었다.

 
등록유초란 함은 이 비변사의 등록을 작성하기 위한 초안을 말한다.

 
박태조 박사가 규장각에서 찾아 낸 것이 바로 이 등록유초로서 우리 통영의 새로운 역사는 물론 한국과 일본의 역사계에서 잃어 버린 중요한 사건을 발굴하게 된 것이다.

 
이날 잡혀온 포르투칼 사람 주엉 멘데서의 역사적 위상을 살펴보자. 서양사람의 조선 도래기를 보면 하멜(1630년~1692년)은 네덜란드의 동인도 회사의 소속의 선원(무역선의 포수)으로 1653년 일본 나카사키로 가던 중 태풍을 만나 일행 3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되었다.

 
1666년 억류생활 끝네 탈출하여 1668년 귀국하여 소위 그 유명한 「하멜 표류기」를 작성하게 되었고, 조선이 지리,풍속,정치,군사,교육,교역 등을 최초로 유럽에 소개 하였다.

 
그러나 하멜 보다도 먼저 조선 땅을 밟은 사람은 역시 네덜란드 사람 박연(朴戀 Jan Jense Weltevree)으로 1627년에 제주도에 표류하게 되었고, 나포되자 조선인으로 귀화하여 조선 여인과 결혼 1남 1녀를 남기고 조선에서 생을 마쳤다.

 
▲ 박연(朴燕)이 승선하고 네델란드 Rotterdam을 출항했다는 ‘홀란디아(Hollania)호’    © TYN


박연을 최초의 도래인으로 알고 있으나, 주엉멘데스는 박연 보다 무려 23년이나 앞서 통영 땅을 밟게 된 것이다.

 
필자는 재직시 이런 역사적 사실을 기념하여 당포항에 이를 기념하는 비를 세웠으며 포르투칼 대사도 비의 제막식에 참여해 주었다. 
 
 
 
 포르투칼 대사는 통영시와 포르투칼의 어느 항구도시와 자매 결연을 맺자고 제의를 하였다. 이를 적극 추진해 볼만한 일이다.

 
이경준의 6대 통제사는 통영의 세병관을 만든 분으로 필자가 다른 기고문에 소개한 바 있어 생략한다. 그이 참모장인 신여량 장군은 전도 고흥 출신으로 임진왜란 때 권율의 행주산성 전투에 참전하여 공을 세웠고, 그 뒤 이순신 장군의 막하에서 활약을 했었다.

 
고흥의 신여량 장군의 후손 집에는 조정에서 그의 충성을 그린 전투장면을 병풍으로 그려준 그림이 있는데, 이은상 선생께서 이를 보시고 이순신 장군 휘하에 있을 때 한산대첩의 전투장면을 그린 것이라 하셨으나, 이는 잘못된 것으로 이순신 장군의 장계보고서나 난중일기에는 신여량 장군의 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마침 그 그림에는 칼구리로 일본 배를 나포하는 장면이 있는데 바로 이것은 주인선을 나포한 그림인 것이다.

 
이 그림은 한강의 거복선처럼 통영에 와야 그 빛이 날 것이다. 통영시는 그 후순들과 잘 상의해 보기를 바란다. 

 
영국의 역사학자 E A 카아는 ‘역사는 현재 속에서 부단히 살아 숨쉬며 과거와 대화 한다’고 하였다. 소설이나 드라마의 소재가 충분히 될 수 있다.

 
역사를 반듯하게 세우고 우리들 가슴에 새기는 것은 통영의 정체성을 찾는 일이며, 통영이란 배가 미래를 향해 항해하는 방향을 제시해 주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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